'나'는 선술집에서 '안'을 만난다. 그리고 대화를 나눈다. 무의미한 대화들. 앞뒤 맥락 없이 현재성과 즉흥성에만 매몰된 채 이야기를 만들어 나간다. 그리고는 문득 '의미'를 찾는다는 말에 '나'는 어리둥절해 한다. 그것은 나에게 더이상 즐거운 유희가 아니다. 그리고 너와 나 사이에 어떠한 의미를 부여해야 할 귀찮은 일이 발생할 개연성이 높다. 너와 나는 철저히 소외되어야 하며, 나는 그냥 이 자리의 즉흥성과 신변잡기적 잡담만이 시간을 소비하는 데 '의미'가 있을 따름이다.
그들의 대화가 무르익을 무렵 새로운 '아저씨'가 등장을 한다. 아내의 시체를 기증하고 받은 사례금을 어떻게 써야 할지 몰라 방황하는 이 사람은 '나'와 '안'에게 함께 써 주길 애원한다. '나'와 '안'은 어쩌면 생길지도 모르는 '관계'의 끈에, 챙겨줘야 할지도 모른다는 '책임'의 끈에 회피하려 하지만 '아저씨'는 소외와 떠밀림의 극한에 서서 그들을 지독하게 옭아맨다.
셋은 독립된 우주로 존재하여 일정한 공전궤도 없이 서로를 의식하지 않고 떠돌고 있다. 그 중 하나는 관계의 회복을 염원하지만, 귀찮고 피곤하여 둘은 그것을 끊어버린다. 세상의 모든 끈과 단절된 독립된 우주가 선택한 '뻔한' 결말을 '안'은 예측하고 있었고, '나'는 예측하지 못했다.
여기에서 인간성 회복의 단계로 나아가는 과정이 아니므로 그 예측의 무가치성이 비인간적 무관심으로 귀결되며, '안'에게는 냉혹한 현실의 냄새가, '나'에게는 무뎌진 인간관계적 관찰의 한계가 느껴진다. 무엇이 되었든 그것은 비인간적이다. 오히려 '아저씨'에게서, 그 극한의 고독에서 밀려오는 인간적 냄새와 그 결정에 고개가 끄덕여지기도 한다.
그러나 혜안(?)이 있었던 '안'은 '아저씨'의 결정으로 인하여 새로운 사고의 확장과 낙관적 전망을 얻게 된다.
"두려워집니다.""뭐가요?"
내가 물었다.
"그 뭔가가, 그러니까...."
그가 한숨 같은 음성으로 말했다.
"우리가 너무 늙어 버린 것 같지 않습니까?"
"우린 이제 겨우 스물다섯살 입니다."
나는 말했다.
"하여튼...."
하고 그가 내게 손을 내밀며 말했다.
늙어버림에 대한 두려움은 곧 자아 성찰에 기인한 것이며, 내부적 불안감이 늙어버림에 대한 두려움으로 표출된다는 것은 미성숙한 자아가 깨달음의 계기 없이 생물학적 나이가 차고 있음에 대한 자아 반성일 것이다. 세상 일에 무뎌져 버린, 그리고 세상 일에 대해 진지한 고민을 하지 않는 나이듦은 철듦에 빗겨서서 어긋나기 마련이다.
내 발목을 잡는 개미를 뿌리치는 매우 사소한 일은 오히려 역설적으로 개미가 잡는 힘을 느낄 만큼 관계 형성에 메마른 당시의 모습을 드러내고 있는 것은 아닐는지. 그리고 그 당시를 염려하여 이 글을 쓴 김승옥의 기대에 부응하여 현재 '대한민국, 2014년 가을'은 50년 전 그때보다 얼마나 더 따뜻해져 있을는지.
'문학 > 현대소설 평설' 카테고리의 다른 글
'Sderot cinema'에 대한 단상 - '인간에 대한 예의 - 공지영'을 떠올리며 (0) | 2014.07.19 |
---|
댓글